
9년된 나의 도시락 가방. 서비스로 받은 작은 에코백을 받아 들고 '이건 딱 도시락 가방이다!' 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학교 급식이 시작됐다. 그렇게 엄마가 싸주던 도시락도 끝이 났다.
엄마는 식구 많고, 제사 많고, 친인척 많은, 심지어 4대가 모여사는 집의 맏며느리였다. 증조할머니가 계셨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형제들도 많아 우리 집에는 어른들이 수시로 방문했다. 제사나 명절에는 시골에서 온 방문객이 며칠을 머물고 가기도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우리 집 밥상은 늘 어른들 입맛에 맞춘 토속적인 반찬이 가득했다. 나는 그 밥상을 시골밥상이라며 몹시 싫어했고 매일 같이 반찬 투정을 했다. 나이가 들고, 독립을 한 후에야 내가 시골밥상이라고 지칭했던 엄마의 밥상이 귀한 반찬으로 가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식구 많은 집, 어른들 반찬을 매일 만들 때보다 엄마가 더 신경 써서 만든 반찬은 오빠와 나의 도시락 반찬이었을 것 같다. 학교에 가져가는 점심 도시락은 엄마의 솜씨와 정성을 확인하거나 때로는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도시락 반찬으로 햄을 넣어도 꼭 계란옷을 입혀 구웠고, 참치캔은 양파, 고추, 깻잎 등을 넣은 참치전이 됐다. 어떤 날은 계란옷과 깻잎에 감싸진 후랑크소시지를 비스듬히 잘라 넣어주었다. 오래된 기억을 들쳐보면 학교 급식을 가장 반겼던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을까.
나의 점심은 도시락에서 급식으로, 그리고 학식을 거쳐 경로식당(첫 직장이 복지관이었다)으로, 또다시 학식(퇴사 후 대학원을 갔다)으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내니 엄마가 매일 고민하며 싸주던 도시락은 내 기억에서 멀어졌다. 가끔 생각나는 추억도 되지 못한 채.
고등학교 급식으로 종말을 고했던 도시락은 예상치 못하게 내 나이 서른에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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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된 나의 도시락 가방. 서비스로 받은 작은 에코백을 받아 들고 '이건 딱 도시락 가방이다!' 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학교 급식이 시작됐다. 그렇게 엄마가 싸주던 도시락도 끝이 났다.
엄마는 식구 많고, 제사 많고, 친인척 많은, 심지어 4대가 모여사는 집의 맏며느리였다. 증조할머니가 계셨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형제들도 많아 우리 집에는 어른들이 수시로 방문했다. 제사나 명절에는 시골에서 온 방문객이 며칠을 머물고 가기도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우리 집 밥상은 늘 어른들 입맛에 맞춘 토속적인 반찬이 가득했다. 나는 그 밥상을 시골밥상이라며 몹시 싫어했고 매일 같이 반찬 투정을 했다. 나이가 들고, 독립을 한 후에야 내가 시골밥상이라고 지칭했던 엄마의 밥상이 귀한 반찬으로 가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식구 많은 집, 어른들 반찬을 매일 만들 때보다 엄마가 더 신경 써서 만든 반찬은 오빠와 나의 도시락 반찬이었을 것 같다. 학교에 가져가는 점심 도시락은 엄마의 솜씨와 정성을 확인하거나 때로는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도시락 반찬으로 햄을 넣어도 꼭 계란옷을 입혀 구웠고, 참치캔은 양파, 고추, 깻잎 등을 넣은 참치전이 됐다. 어떤 날은 계란옷과 깻잎에 감싸진 후랑크소시지를 비스듬히 잘라 넣어주었다. 오래된 기억을 들쳐보면 학교 급식을 가장 반겼던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을까.
나의 점심은 도시락에서 급식으로, 그리고 학식을 거쳐 경로식당(첫 직장이 복지관이었다)으로, 또다시 학식(퇴사 후 대학원을 갔다)으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내니 엄마가 매일 고민하며 싸주던 도시락은 내 기억에서 멀어졌다. 가끔 생각나는 추억도 되지 못한 채.
고등학교 급식으로 종말을 고했던 도시락은 예상치 못하게 내 나이 서른에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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